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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생각

비내리는 클리브랜드, 연극 리뷰

by BUlLTerri 2018.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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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이라는 형태의 콘텐츠는 여타 대중문화 콘텐츠에 비해 자주 접할 기회가 적은 것 같다. 콘텐츠 자체가 갖고 있는 문제라기 보다는 접할 기회가 적다보니 나 스스로가 연극에 대해 덜 익숙하게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은 더이상 볼 수 없는 연극이지만 재미교표 2세라는 독특한 주제를 다뤘던 연극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비내리는 클리브랜드 시놉시스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 자랐지만 미국사람으로도 또한 떠나간 한국 사람으로도 살지 못하는 사람들. 주인공 남매 지미와 마리는 우하이오주의 농장에서 살고 있다. 어릴 적 그림 한 장을 남겨두고 집을 나간 엄마. 아이들이 성년이 되자 또다시 홀연히 사라진 아버지, 사라진 부모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지미는 이 암울하고 혼란한 상황을 정리해줄 큰 홍수가 올 거라고 믿고 있다. 그는 자신의 폭스바겐을 노아의 ‘방주’로 만드는 작업을 하며 비를 기다리고 있고 마리는 일주일전에 집을 나간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고속도로를 헤맨다. 




 비내리는 클리브랜드는 재미교포 2세대 젊은이들이 느끼는 방황과 허무, 묵시록적 희망 그리고 그 배경에 놓여있는 가족의 분열, 이방인이기도한 그들의 정체성과 문화에 대한 고뇌들을 비사실적인 무대기법과 서정적인 무대 공간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극 중 등장인물이 느끼고 있는 고뇌가 단지 교포 2세대들만의 아픔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교표 2세대들의 아픔이기도 하며 우리 사회에도 만연하게 존재하는 편견과 선입견들에서 파생되는 아픔이기도 하다. 또한 나의 아픔이기도 하다. 인생에서 가장 큰 결정을 해야만 하는 취업 전쟁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이 길이 맞는지 확신을 가질 수 없어 느끼는 방황과 결국 취업을 위한 과정으로 치부될 지도 모르는 나의 지난 인생들에 대한 허무가 이 연극의 주인공들이 느끼는 그것과 닮아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사회의 개인들이 느끼고 있는 그리고 내가 느끼고 있는 아픔과 고뇌를 갖고 있는 극 중 인물들을 나로 치환하여 그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를 보고나면 뭔가 나의 인생에 대해 불확실했던 것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이 연극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홍수는 올 것인가.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결말이 너무도 궁금했다. 

 ‘비내리는 클리브랜드’에는 다섯 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지미 로댕, 마리, 스톰, 믹 그리고 강동수. 지미는 1년 동안이나 같은 꿈을 꾼다. 대홍수가 와서 클리브랜드는 물에 잠기게 되고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물에 뜨는 폭스바겐을 타고 여행을 떠나는 꿈이다. 마리는 지미의 여동생으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 수백 수천 마일을 헤매고 다닌다. 스톰은 오토바이를 타고 빠른 속도로 도로를 달리다 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치게 되고 이 사고를 목격한 마리의 도움을 받게 되어 폭스바겐이 있는 차고로 오게 된다. 믹은 자동차 정비공이다. 지미의 폭스바겐을 물에 띄우기 위해 함께 차고에서 폭스바겐을 수리하는 일을 한다. 마지막으로 강동수는 나머지 4명의 인물들과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대표하며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직장을 그만두고 패배감과 후련함을 동시에 느끼는 인물이다. 그는 연극 속에서 하나의 액자 틀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는 기타를 연주하며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음악을 한다. 그가 연주하는 음악은 클리브랜드에 존재하는 4명의 인물들의 사건의 배경음악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클리브랜드와 강동수가 존재하는 공간을 연결하는 수단으로 강동수의 기타 연주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강동수의 존재는 강동수의 공간과 클리브랜드의 공간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강동수는 관객들이 연극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고 관객들이 극 중 인물들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즉 극 중 강동수의 역할은 스스로 클리브랜드라는 스토리의 액자 틀 밖에서 존재하며 액자 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관객들을 그 틀 밖으로 다시 빼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브레히트가 제시한 서사극 이론이 적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브레히트는 이성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감정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되고, 극은 서사적인 서술 기법을 통해 관객에게 일정한 거리를 제시한다. 여기서 강동수는 관객들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강동수를 제외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비내리는 클리브랜드는 갈등이 비유로 변환된 연극에 가깝다. 계속해서 홍수를 기다리고(지미), 두려워하던 옥수수 밭에 뛰어들고(믹), 공부하던 의학책을 불태워버리고(마리), 함께 사고가 났던 상대방이 죽었단 소식에 미친 듯이 또 허망하게 웃는다(스톰). 또한 이는 마리를 제외한 등장인물 모두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지미는 총이 손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총이 발에 박혀 다리를 절고, 수리하던 차에 깔리면서 수술을 받은 믹은 다리에 넣은 금속 때문에 비가 올 때마다 다리가 쑤신다. 스톰 역시 아침에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다가 트럭과 충돌해 다리를 크게 다친다. 하지만 유일하게 멀쩡한 다리를 가진 마리만이 다른 등장인물이 겪는 고민에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결국 마리는 의학책을 불태워버리고 비내리는 옥수수 밭에서 색깔이 묻어나는 것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옛날 어머니가 그렸던 그림을 찾아낸다. 믹과 지미는 감정을 원료로 움직이는 엔진을 만들어내 물에 뜨는 폭스바겐을 만들고 마리가 찾아낸 그림을 연료로 하여 폭스바겐을 타고 그들의 이상향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독특한 표현 방식, 뻔한 결말


 비내리는 클리브랜드의 형식과 스토리 표현 방법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고정관념을 깨트렸다. 극 배우들은 연극 시작부터 춤인지 몸부림인지 알 수 없는 동작들을 보여주며 등장한다. 또한 그들은 서로 간에 대사를 주고받기 보다는 각자의 독백에 의존한다. 이는 관객들이 각각의 등장인물의 내면에 집중하기를 바랐던 연출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 같다. 그러나 형식과 표현 방법의 독창성에 비해 그 결말과 갈등 해결과정은 너무도 뻔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결국 홍수는 왔고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향을 향해 폭스바겐을 타고 떠난다는 전형적 결말은 극의 독특한 표현 방식마저 반감시키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극 중 인물들이 겪는 편견과 고통은 현재의 한국 사회의 고민과 고통들을 충실하게 반영한 것 같다.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누구든지 교포2세대가 될 수 있다. 집단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그들의 국적이 어떻든 그들은 결국 교포2세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독특한 형식과 이해하기 어려운 대사들은 관객들에게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가만히 수용하는 입장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들을 나름대로 재구성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봤을 때 비내리는 클리브랜드는 상업적 대중문화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주로 소극적으로 문화 콘텐츠가 제공하는 내용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대중문화와의 콘텐츠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문화와 클리브랜드와 같이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 간의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겪은 피로감을 풀기위한 콘텐츠로는 대중문화가 좋을 것이고 고급 형식으로서의 문화는 그 나름대로 사고의 폭을 넓혀주고 사회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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