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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생각

이와이슌지의 영화 '피크닉'에 대한 분석

by BUlLTerri 2018.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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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분석하고 해석한다는 것은 조금 낯선 행위일 수 있다.

영화는 그저 아무 생각없이 즐기면 되는 오락거리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아무 생각없이 즐기며 영화를 봤다.


그래도

가끔은 분석적인 기법을 통해 

영화를 보는 즐거움도 느껴보길 권한다.

새로운 경험이될 수 있을 것이다.

해보고 별로면 그냥 안해도 상관없다.


다음의 글은 대학시절 얕은 정식분석학에 대한 지식으로 좋아하는 영화를 분석해본 결과이다.





Lacan의 정신분석학을 통한 영화 분석

(주인공 ‘코코’를 중심으로) 


줄거리 


 일본의 한 정신 병원에 입원한 코코와 츠무지 그리고 사토루, 코코는 어렸을 적에 쌍둥이 동생을 죽였고, 츠무지는 자신을 성폭행한 선생을 살해했고, 사토루는 과거의 기억에만 얽매여 살아가고 있는 상태다. 어딘지 모르게 기분 나쁜 병원의 의료진들과 갑갑한 병원 생활 속에서 친구가 된 세 사람은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그 종말을 보기 위해 함께 병원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이들에겐 병원 담장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다. 결국 그 규칙을 깨지 않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는 묘안을 생각해 낸 그들은 유유히 병원을 빠져나가는데, 그 묘안이란 담에서 내려가지 않고 담을 따라가  는 것이다. 담을 따라 종말을 보기 위해 바닷가를 향하던 중 사토루는 담 위에서 떨어져 죽게 되고 바닷가에 도착해 종말을 기다리던 코코와 츠무지는 종말이 오지 않음을 깨닫는다. 이때 코코는 자신이 죽어야만 종말이 올 것이라고 믿고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겨눈 뒤 방아쇠를 당긴다. 

 

 어렸을 적 코코가 자신의 쌍둥이 동생을 죽인 것은 자신이 진짜임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진짜가 의미하는 것은 누가 진짜 어머니의 자식이냐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완벽한 상태였던 엄마 뱃속에서부터 자신의 공간을 뺏어 왔던, 그리고 어머니와 자신의 완전한 합일을 방해했던 동생을 죽임으로써 코코는 어머니를 완전한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코코의 근원적 욕망(desire)에 대한 열망을 의미하며 이것을 표출하여 동생을 죽인 것은 코코가 상징계적 질서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상상계적 세계를 고수하며 자신이 원하는 열망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코코가 자신의 동생을 죽인 후 부모님에 의해 가게 되는 정신 병원은 모든 환자들에게 같은 모양 같은 색(하얀색)의 옷을 강요한다. 그러나 코코는 하얀색 옷을 거부하며 까마귀 털로 만든 검정색 옷에 집착한다. 하얀색은 병원에서 규정하고 있는 상징계적 규칙이며 코코가 생각하는 진짜가 아니다. 상징계의 시각에서 보면 병리적인 현상으로 여겨 질 수 있는 까마귀 깃털 옷과 검정색에 대한 집착은 자신이 동생과는 다른 진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계적 규칙의 의식적 거부이다. 여기서 자신이 진짜이며 동생이나 상징계 속의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길 원하는 대상은 타인이 아닌 코코 그 자신이다. 이것은 코코가 검정색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는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들어난다. 이는 거울단계에서 거울을 통해 확인한 자신의 모습이 거울을 보기 전에 봤던 동생의 모습과 같음을 확인하며 겪게 되는 주체 중심적 자아 형성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병원의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 또는 상징계에 속해있는 동생과는 달리 자신은 진짜임을 스스로의 자아에게 입증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코코가 동생을 죽인 후 자신을 진짜 자식이라고 인정해야할 어머니는 오히려 코코를 정신병원에 버린다. 이로 인해 코코는 자신이 진짜임을 증명 했음에도 자신을 정신병원(상징계)으로 버린 부모를 진짜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속 코코의 대사 “하느님이 있다면 우리 엄마와 아빠가 하느님일 거야” 에서 알 수 있듯이 코코는 자신의 진짜 부모는 실재계 속에만 존재하는 신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라고 믿는다. 결국 코코는 상징계속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거부하며 자신의 상상계 속에 존재하기 위해 병원의 담장위로 올라간다. 코코는 담장의 좁은 길을 통해 상징계로부터 벗어난 듯한 자유로움을 느끼지만 이것은 상징계의 규칙을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다. 담장을 타는 행위는 병원 담장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어기지 않고 제한적으로 상징계를 벗어나는 수단인 것이다. 여기서 담장위의 좁은 공간은 코코의 상상계와 상징계가 혼재되어 있는 경계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병원의 담장을 벗어 날 수 없다는 점에서 상징계의 성격을 갖지만 코코의 상상에 의해 생성된 상상계에서는 자신을 상징계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상상계와 상징계 둘 중 어느 하나에만 속해 있지는 않는다. 이런 담장위의 코코를 보았을 때 사실 코코는 신의 자식이 아니며 그 자신 또한 결국 상상계와 상징계의 중간에 위치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코코는 담장 위에서 우연히 만난 신부에게 성경책을 받게 되고 성경책에 적혀 있는 지구 최후의 종말을 보기위해 담장을 타고 병원을 벗어나 바다로 떠나게 되는데 여기서 성경책은 언어의 세계 즉 상징계를 의미한다. 코코가 지구 최후의 종말을 원하는 이유는 성경책 속 지구 최후의 종말이 코코의 상상계속에서 만큼은 상징계의 최후의 종말을 뜻하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상징계의 규칙을 극복하지 못한 채 바다로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담장위의 제한된 자유로움처럼 성경책 속 지구의 종말 또한 상징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코코는 마침내 바다에 도착해 세계의 종말을 기다리지만 종말은 결코 오지 않는다. 상징계의 규칙 속에서 지구의 종말을 보았지만 그것은 결코 진실이 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코는 이것을 상징계적 규칙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자신이 실재계에 속한 신의 자식이기 때문에 자신이 죽지 않으면 상징계의 지구가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결국 코코는 자신의 근본적 욕망(desire)을 채워 줄 수 있는, 또한 자신의 진짜 어머니가 있는 실재계로 가기위해 죽음을 택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 한 것처럼 코코가 죽은 뒤에도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는다. 이는 코코가 원했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죽음은 코코의 상상계적 생각 이였을 뿐 결코 실재계는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코코의 상상계적 믿음은 거울 단계에서의 뒤틀린 나르시즘적 자아 형성으로 인해 근원적인 욕망(desire)에 더욱 집착하게 됨에 따라 상징계로의 편입이 지연되어 상상계가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음에 기인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코코의 죽음은 실재계로의 진입이 아닌 모든 인간들이 무의식 속에 가지고 있는 욕망(desire)에 가깝다. 왜냐하면 죽음은 엄마 품속으로의 회기를 뜻하며 이것은 Lacan이 말하는 근원적 욕망(desire)과 직접적 연관을 갖기 때문이다. ‘피크닉’은 근원적 욕망(desire)을 이루기 위해 떠나는 주인공 코코만의 상상계 속 소풍을 의미 한다. 결국 코코는 죽음을 통해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부모가 있는 나르시즘적 상상계속으로 영원한 ‘피크닉’을 떠난다. 비록 그것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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